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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파이트는 페이지를 넘기다 손을 멈췄다. 요새 눈이 좀 침침하다. 전등 불빛 아래에서 인쇄된 활자를 읽는게 꽤 불편했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려 손을 올렸더니 책이 금세 덮여 버렸다. , 이래서 한 손으로 읽는 건 불편하다니까. 소파 팔걸이로 목을 툭 누이며 앓는 소리를 낸다. 파라드가 아프냐고 묻지만 짧게 아니, 하고 입을 꼭 닫았다.

읽는 건 스위츠 관련 레시피 북인데,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린 건 좋다지만 글씨가 작았다. 입맛을 돋우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지 않나. 괜히 입맛을 다시며 다시 책을 펼쳤다. 초콜릿 크런치 케이크의 레시피는 67쪽에 있었다. 카카오 가루를 넣은 스펀지 케이크에 생크림을 바르고 초콜릿으로 코팅한 뒤 초코 크런치를 뿌리는 아주아주 다디단 케이크였다. 그라파이트는 재료를 눈으로 훑으며 읊조려 보았다. 박력분 150g, 계란 2, 코코아 파우더 30g, 버터 110g, 설탕 100g, 베이킹파우더 3g, 우유 50g. 파라드, 거기 핸드폰 좀 집어줘. 그래, 이거 찍어. 책을 펼쳐서 대주자 파라드는 군말 없이 그라파이트의 핸드폰 갤러리에 재료를 찍어 담는다. 찰칵 소리가 유독 기묘하게 들렸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파라드가 해 주려고? 웅얼거리며 물었고 그라파이트는 말 대신 끄덕임으로 답했다, 파라드는 그닥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이따 마트에 들려서 재료를 사 둘 참이다. 박력분이랑 코코아 파우더는 저번에 쓴게 남았고, 계란이 하나밖에 없었던 것 같으니까 그거랑, 우유도.

파라드가 다시 입을 연다. 난 별로 안 먹고 싶은데. 산통을 깨는 소리였다. 그라파이트는 내가, 먹고 싶어서. 라는 말을 꾹 삼킨 채로 그럼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뭐든 상관없다는 대답을 하는 파라드한테서는 그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라파이트는 마음 한쪽이 쿡쿡 쑤시는 걸 느끼며 지난주의 메뉴를 줄줄 읊었다. 파라드는 어떤 음식에도 호불호를 표하지 않았다. 그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릴 뿐이었다. 디저트 종류는 별로 안 먹고 싶은 거야? 저번의 마카롱은 나쁘지 않았다며. 파라드. 파라드, 어쩔 거야. 오늘도 저녁 안 먹으면 다음부턴 안 줄 거니까.

파라드는 그제서야 그라파이트의 손에서 입을 떼고는, 그럼 아까 그 케이크 만들어줘. 하고 말한다. 입가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손으로 대충 문지르려 드는 파라드를 그라파이트가 잡아 말렸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한 손으로 파라드의 손목을 잡았다. 책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피가 묻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본다. 파라드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옷에 피 묻으면 안 지워진다니까. 깨끗이 먹으라고 했지. 별 대꾸도 없이 일어난 파라드가 지혈할 거 가지고 올게, 툭 내뱉으며 자리를 뜬다.


그라파이트는 살점이 뭉툭하게 패인 손을 힐끔 보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호죠 에무랑. 수업이 끝나고 돌아온 다음부터 계속 저 상태다. 오자마자 뚱하길래 먹겠냐고 물으니 별로 내키지 않는단 얼굴을 한 주제에, 막상 손을 내주니 오독오독 잘만 깨물어 먹었다. 아직 저번 식사에서 남은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흉터가 늘어날 판이다. , 하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진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피가 모자라는데 어떡하지. 허탈하게 웃지만 사실, 전혀, 웃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라파이트는 피로 얼룩진 카페트를 바라보았다. 이리로 이사 오고 나서부터는 어쩐지 이 소파가 딱 식사시간용으로 정해져 버려서, 좀 전처럼 자신은 누워있고 파라드가 아래에 앉아 손을 깨무는 게 당연하게 되었다. 그라파이트는 이 소파에 앉는 걸 피했다. 앉아있으면 자꾸 파라드가 먹으러 오니까. 무슨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리 깔끔한 식사를 하는 편이 아닌 파라드 때문에 일부러 적갈색 카페트도 하나 사다가 깔았거늘 핏자국은 굳건히 남아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며 존재감을 알렸다.

그라파이트. 툭 내뱉는 이름에 어떤 감정이란 없다. 그라파이트는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약간 흐린 시야에 파라드가 잡힌다. 감흥 없는 표정. 방금 맛있는 간식을 먹은 아이치고는 재미없는 모습이다. 똑같은 맛에는 질렸다, 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내린다. 한 손에 얼룩덜룩한 수건, 한 손에 구급상자. 그라파이트는 성한 손을 뻗어 구급상자를 받아들었다. 고마워. 피식자가 포식자에게 감사 인사라니 아이러니하군.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상자를 연다. 지혈제며 거즈 같은 것이 가득했다. 그라파이트는 멸균 거즈 한 봉지를 들고 입으로 봉투를 찢어냈다. 손을 감싸고 꾹 누른다. 거즈 위로 피가 배어 나오면 그 위로 새로운 거즈를 덮고 다시 압박. 자연스러운 몸짓이었고 파라드는 가만히 그를 지켜본다. 그에게는 지금도 아주 달콤한 냄새가 나겠지. 아주 달콤한


파라드.

하고 운을 뗀 것은 어떠한 충동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그라파이트는 제 손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맛있었어?

파라드는 응? 하고 되묻더니 달았어, 하고 대답한다.


그라파이트는 다시 단 건 알고 있으니까 맛있었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굳이 입 밖으로 질문을 꺼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래. 그치만 좀 얌전히 먹지 그랬어, 또 카펫에 피가 흘렀잖아, 하고 핀잔을 줄 뿐이었다. 파라드는 꿍한 소릴 내더니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라파이트는 속으로 수천 가지의 말을 삼켰다. 맛있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더는 내가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내가, 더 이상, 너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게 되면, 네가 결국 나를 떠나게 되면


초콜릿 케이크. 파라드가 돌연 물음을 던진다.

?

무슨 맛이야?

달콤한 맛.

그라파이트랑 비슷할까?

글쎄? 나는 알 수가 없으니까.


대답을 듣자마자 곧장 묵묵부답이다. 무슨 말을 기대했더라도 돌려주지 않을 것처럼 입을 꾹 다문다. 그라파이트는 그저, 나와 비슷하다고 하면 맛있게 먹어줄 거냐, 하고 다시금 늘어난 질문을 곱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거즈 위로 붉게 피가 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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