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일행도 하나 없이 검 하나만을 허리춤에 차고 빈집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한눈에 남자가 용사이리라 짐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감이라고 하는 게 좋을까. 옛날부터 그런 감은 참 좋았으니까. 남자가 자신을 눈치채기 전까지, 라는 이유를 붙이며 학자는 저를 기다리는 손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뜯어보았다. 허술한 무장에 비해 눈에 띄게 고급스러운 검. 가죽 허리끈에 동여매진 검집은 옛 전승에 나오는 전설의 검에 대한 묘사와 한 줄도 다를 바 없이 같았다. 분홍색 다이아몬드 주위로 섬세한 세공이 되어있고,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녹아들어 있었다. 자세히 보기에는 거리가 좀 되는 것이 아쉬웠다. 학자는 잠시 눈을 꼭 감았다. 은장식이 달린 손잡이에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신 탓이다. 그는 시린 눈을 문지르고 잠시 후 다시 떴다. 그때까지 남자는 집 안에서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듯, 미동도 없이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모양이다. 학자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본인을 금방 발견할 수 있을 텐데. 그는 드디어 목소리를 냈다.
이봐~
동그란 눈을 가진 남자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남자, 라기엔 많이 앳된 얼굴이다. 학자는 소년과 용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용사라는 호칭을 쓰기로 한다. 이리 오라는 손짓에 용사는 군말 없이 뽀르르 걸음을 옮겨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쿠죠 키리야 씨?
아아, 본인이야. 본인. 무슨 일?
와! 제대로 와서 다행이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호죠 에무라고 합니다.
호죠? 처음 들어보네. 이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네에.
용사는 날씨만큼 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옆 동네에 살고 있는데, 산에 들어갔다가 이 검을 발견했고, 그 사실을 촌장님이 알아채서, 너는 사악한 마왕을 쓰러트릴 용사라며 갑자기 모험을 떠나라고 등 떠밀려 졌기 때문에, 소문으로 이 동네에 대단한 현자가 있다기에, 도움을 청해보면 어떨까 하고. 그래서 이리로 왔어요! 남자는 학자가 차를 내오겠다고 말을 끊을 틈도 없이 줄줄줄 사정설명을 쏟아놓았다. 그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말을 꺼낼 타이밍을 줄곧 재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결론이 지어지자 외려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3초간의 머뭇거림.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삐죽 웃어 보인 학자가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그래서? 어쩌고 싶은거야? 모험을 떠나기 싫은 거야? 아니면 어떻게 떠나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음~ 후자일까요.
떠나고 싶긴 한 거구나?
학자는 색안경을 밀어 올리고 용사의 눈을 마주 보았다. 용사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눈이 맑게 빛났다. 학자는 다시금 눈이 부셨다.
그야, 두근거리잖아요! 모험인걸요.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소년의 풋풋한 패기가 흘러넘치는 답변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꼬맹이인 거고. 순수함이 마왕을 무찌르는 데에 도움을 줄지 모르겠네. 학자는 속으로 혀를 차며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잠깐 기다려. 차를 내 올 테니까.
***
용사는 차가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다. 한 모금 삼키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학자는 설탕 세 숟갈을 퍼넣고 휘휘 저었다. 낮은 탄성이 들렸다. 저걸 저렇게까지 달게 마셔, 하는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단걸. 숟가락을 입에 문 그가 용사는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네?
칼~ 용사님 이야기가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정도는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겠어.
아, 네! 여기요.
의심도 없이 허리띠 채로 풀어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학자는 남자를 힐끔 보고는 검집에 손을 댔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보통 검은 아니다.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그조차 읽을 수 없는 고대의 언어로 적힌 주문이었고, 어지간해선 구할 수 없다는 이계의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분홍빛 다이아몬드는 여전히 빛났다. 용사는 이 검의 가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순수한 얼굴로, 학자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이대로 검을 훔쳐 달아나면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 손에 들어올 텐데. 그럴 가능성은 요만큼도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모양이다.
마왕 퇴치를 해야 한댔던가?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이 어디 있는지, 알아?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학자는 검집을 손끝으로 밀어 그의 앞에 두었다. 알맞게 식은 차를 입에 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용사는 무언가 대답을, 혹은 해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을 한 초보 용사. 몇 가지 수식어가 붙자 용사라는 단어가 아주 어리숙하고 순수하고, 얼핏 바보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얗고 말랑해 보이는 손에 굳은살은 박혀있을지 어떨지 궁금해지자, 학자는 입맛을 다시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설탕의 단맛이 혀에 달라붙었다. 오늘따라 그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아 혀를 찬다. 용사가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학자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차와 함께 가져온 지도를 한 장 펼쳐놓았다. 전설 속 용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물은 학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과 마주하자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금세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머잖아 목이 마를 예정이다.
그의 이야기, 혹은 설명은 해가 다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노을 지는 언덕에 거목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렸다. 그동안 두 명의 손님이 그를 찾아왔으나, 한 명은 단지 차를 마시러 온 느긋한 아저씨였고 한 명은 길을 묻는 여행자였기에 별 방해는 안 되었다. 용사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얼마나 이해했는지 중간중간 질문을 던져 보았는데 이해력은 빠른지 틀리는 법이 없었다. 학자는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눈을 반짝이며 맞췄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하며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강아지가 아니야, 사람이다. 실례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겨우 마음을 다잡는다.
주위가 어두워짐과 동시에 바람이 점점 차가워졌다. 그의 설명도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지도에 검지로 동그라미를 치며 이곳이 그 마왕 성으로 가는 통로가 있다고 예상되는 곳이야. 하고 말을 마치고 나서야, 몇 시간 동안이나 혼자 떠들어댄 입이 닫힌다. 그는 숨을 내쉬며 빈 찻잔을 들었다. 차게 식은 잔을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인의 이야기, 이해했지? 용사님 같은 햇병아리가 나설 판이 아니야. 돌아가는 게 어때? 그 검을 발견했다고 그쪽이 용사의 전설을 이어가야 한다니 거 촌장님 꿈도 야무지시지. 이런 꼬마를….
꼬마 아니에요! 확실히 성인이라구요.
몰라봐서 미안하네. 그래서?
그는 여우같이 웃었다. 한 손으로 색안경을 벗어 셔츠에 걸치고 용사를 쳐다본다. 어쩔거야? 초보 용사는 검집을 야무지게 쥐고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든요. 마왕을 봉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라도 있어? 아뇨. 이 검을 발견한 게 운명이라고 생각해? 조금은요. 마왕을 쓰러트릴 힘은 있는 것 같아? 용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진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고르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해가 마지막으로 붉은빛을 내뿜는 순간, 용사가 입을 열었다. 키리야 씨가 저와 함께해 주신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학자는 다시금, 여우같이 웃었다. 용사가 그를 쳐다본다. 붉은 기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하늘에 아직 노을의 파편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는 용사의 어깨너머에서 흐려지는 파편들을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틀어 용사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대로 시골구석에서 의원 노릇이나 해 가며 여생을 마무리할 수도, 수도로 돌아가서 대학의 문을 두드릴 수도, 아니면 이곳을 떠나 방랑자처럼 지식을 찾아 돌아다닐 수도 있는 미래를, 남자는 당돌하게도 자신을 위해 써 달라고 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마왕 같은 거 서로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을 텐데.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해결될 문제란게 있을 수도 있는데.
학자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감이 나쁘지 않았다. 괜찮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일생일대의 도박을 해 봐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용사의 눈에 제 인생을 걸어도 썩 나쁜 결과만은 나오지 않으리라. 이런 용사라면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어차피 하는 일도 없는데, 하고. 아마 자신은 이걸 위해서 이 마을에 정착해서 지금껏 느긋하고 안온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도달한다. 설명은 너무 오래 해 왔다.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래, 짧게 말하자.
그 제안, 타지.
용사에게 반했다고 하면 설명이 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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