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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시점(이걸 왜 지금 쓰는 걸까요? 정말 궁금하다)

*커플링 생각하고 쓰진 않았는데...커플링인지는 잘 모르겠고 그렇읍니다









 CR에서 돌아왔을 때 그라파이트는 엉뚱한 것까지 같이 가지고 와 버렸다. 한 손에 케이크 접시, 한 손에 뽀삐 삐뽀빠뽀 소유로 보이는 연두색과 병아리색의 포크. 부조화의 극치를 이루는 그 식기를 들고 작게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어 우물우물 먹는다. 볼이 보기 좋게 부풀었다. 인간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익숙한 동작일 테지만, 물론 그라파이트도 겉보기에는 인간이지만, 어쨌든 우린 버그스터잖아?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에 슬쩍 띄운 미소까지, 그럴 때가 아니라고 해 주고 싶었지만 좋아하는 모양이니 가만히 있기로 한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건 봤는데 언제 가져왔담. 에무의 몫이려나. 아니면 브레이브의 몫이려나. 마지막까지 남겨 둔 딸기를 콕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희미해져 가는 생크림 케이크의 맛을 머릿속에서 그린다. 케이크. 에무가 어릴 때 좋아한 간식. 시트는 폭신하고, 크림은 달콤하고. 한 조각 더 먹고 싶지만, 오늘 먹으면 내일 몫의 케이크가 없어지니까 안 돼, 하고 참으며 오늘치 케이크를 야금야금 잘라 먹는다. 입에서 녹는 것 같다는 말을 케이크로 배웠던가. 에무는 딸기를 아껴 먹겠다며 절반을 잘라 먹고는 참지 못해 그대로 입에 넣어버리는 아이였다. 내 성격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입을 오물거리면 그 맛이 다시 느껴질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 맛도 나지 않지만. 애초에….

…그라파이트.

웅?

 응, 하고 대답하려던 거겠지. 입안에 들어찬 케이크 때문에 예상외의 귀여운 발음으로 부름에 대답한 그라파이트는, 스스로도 놀랐는지 두어 번 헛기침하고 목을 가다듬은 채 다시 왜? 하고 물어왔다. 나도 따라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참아냈다.

케이크, 맛있어?

…음.

 접시에 포크를 내려놓고 그는 잠시 고민했다. 답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을 옮겼다. 천장 가까이 달린 손바닥만 한 창문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이 비추는 곳을 향해 몇 걸음이나 드는지 셈하며 걸었다. 빛이 간신히 닿는 곳, 구석에 쌓인 드럼통 위의 먼지를 후 불어 털고, 잠시 콜록거린 뒤 훌쩍 뛰어올라 앉았다. 빛과 함께 하얀 먼지가 춤을 췄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발을 까닥이고 있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그라파이트가 모르겠다. 고 대답했다. 그리고 접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모르겠다고? 맛있게 먹었으면서.

…아무 맛도 안 나는 거 알잖아. 버그스터니까.

 미련 없이 접시를 어두운 구석으로 휙 던진다. 뽀삐 색 포크도 같이. 나와는 정 반대쪽이다. 겐무같이 새카만 어둠 속에서 쨍하니 깨지는 소리가 났다. 저렇게 버릴 필요는 없었을 텐데…아무래도 일부러겠지. 구석을 쳐다보다 어색하게 돌아선 그라파이트가 말없이 다가와 옆의 드럼통에 기댔다. 그도 나도 작게 기침했다. 얼마나 오래 방치되었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먼지가 훅 날렸다. 어두운 갈색 가디건에 하얗게 먼지가 올랐다가 노이즈 한 번에 원상 복구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괜히 다른 쪽을 쳐다보는 그라파이트에게 손을 뻗어 볼을 꾹 누르면 뚱한 표정을 지으며 겨우 이쪽을 쳐다봐 준다. 입 모양으로 왜, 하고 묻는다. 아, 무, 것, 도, 아, 냐.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고 그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손가락 끝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입안에 들어와 녹았다. 그뿐이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내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그라파이트가 황급히 입가를 훔치는 모습을 보며 하하 웃었다.

그러면 왜 먹었어?

…그냥.

그냥?

그냥.

그냥 뭐.

 실없는 문답. 이어지는 질문. 그라파이트는 내 질문들을 싫어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하게 되니까. 나한테 말하지 않은 이야기 얼마나 있어? 하고 물었을 때 방금 그런 소릴 들었으면서 또 묻고 싶다며 한소리 했었다. 그 이후 내 질문이 멈추는 일도, 그라파이트가 계속 숨기는 일에 성공한 적도 없지만. 애초에 조금만 캐물으면 술술 대답해 주면서 처음부터 전부 말하지 않는 네가 나쁜 거야.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지. 다리를 드럼통 위로 올려 끌어안았다. 대답을 재촉하듯 이름을 부른다. 그라파이트. 그라파이트.

알았으니까 그만 좀 불러라.

그래서? 응? 그래서?

…별거 아냐. 궁금했을 뿐이다. 그…브레이브의 연인의 기억이 나한테 있으니까 말이지.

 단 걸 좋아했던 모양이라. 입에 넣으면 어떤 느낌일까 하고. 어물어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그라파이트가 휙 고개를 돌렸다. 빛에 반짝이는 낙엽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반쯤 예상했지만 직접 들으니 놀랍긴 하네. 하하,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 몸이 떨렸다.

그 소리 정말 좋아하네! 브레이브의 연인… 브레이브의 연인…. 으하하.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냐.

 놀리는 거지만. 다시금 손을 뻗는다. 이번엔 머리카락. 시원하게 넘긴 한쪽 머리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흐트러트렸다. 하지 말라며 눈을 흘기지만, 손을 쳐내진 않지. 드럼통에서 뛰어내려 그의 앞에 마주 보고 섰다. 내가 흐트러트린 머리를 선심 쓰듯 정리해 주었다. 손가락으로 빗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쓸어 귀 뒤로 넘겨 꽂았다. 처음과 비슷한 모양새가 되었다.

나도 먹을 걸 그랬나 봐.

아무 맛도 안 나잖아.

기억하는걸. 에무가 먹은 적 있어.

기억….

그래, 나한테는 에무의 기억이 있으니까.

 그라파이트의 어조를 따라 하자 금방 불만스러운 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파라드! 미간에 주름이 팍 잡여 한 걸음 물러섰다. 알았어, 안 할게. 그렇게 째려보면 무섭다니까.

이렇게 한가하게 놀고 있을 시간은 없을 텐데.

…아아, 그랬지.

어떻게 할 거냐?

 흔들리는 먼지를 따라 창문을 올려다본다. 여전히 빛이 비추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더 물러나자 나는 어둠에, 그라파이트는 빛이 비추는 자리에 남아있는 꼴이 됐다. 햇살이 드는 그 얼굴을 잠시 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 그가 왜 그러냐며 세 걸음을 다가왔기 때문에 감상은 길어지지 못했다. 결국 우리 둘 다 그림자에 숨은 꼴이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 계속 빛이 비추는 자리를 보고 있었다. 사람이 있었던 티를 내는 드럼통 위로 흔들리던 먼지가 얕게 가라앉았다. 눈부셔. 중얼거리곤 게이머 드라이버를 꺼냈다. 무게를 가늠하듯 던졌다 받으며 부드러운 굴곡을 엄지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버그바이저를 꺼내 손에 쥔 그라파이트가 다음을 알려달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나의 영웅. 마주친 눈이 그런 걸 말해왔다. 영웅이라고. 버그스터들의 영웅이라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 입을 오물거린다. 역시 먹을 걸 그랬어. 있지, 그라파이트. 너는 어느 쪽이 더 무거워? 신념과 목숨 중에. 어느 쪽.

다음은, 하나뿐이지.

 초록색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얇은 가샤트를 손에 꼭 쥐었다. 난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 게임의 주인공은 나야. 우리야. 버그스터야. 나와 같이 가 줄 거지? 케이크의 맛을 기억하지 못할 때까지, 남아있는 숙주의 기억들이 먼지처럼 내려앉아 바람에 흩어질 때까지. 아무런 맛도 상상해내지 못할 때까지. 그림자에 서 있어도, 어둠에 삼켜져도,

갈까?

그래.

 지옥에 떨어져도. 어울려줄 거지. 같이 있어 줄 거지, 그라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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