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본인 에무랑 그런 관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음만 받을게. 하고, 능청스레 고백을 거절한다. 에무는 씁쓸하게, 담담하게, 어쩌면 그럴 줄을 알았다는 것 마냥 들어주셔서 감사하다며 웃어보이고는 다소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이걸로 된 걸까? 쿠죠 키리야는 중얼거린다. 다섯번째 루프가 시작된 날이었다.
처음 시간이 되감겼을 때 쿠죠 키리야는 얼떨결에 에무의 두번째 고백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야 루프가 어떻게 왜 이루어지는지는 아직도 모른다지만 그땐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반복하는지 그것조차 몰랐으니까. 쿠죠 키리야와 호죠 에무는 연인이 되었다. 에무는 몰랐지만 키리야에겐 두번째였다. 그 다음번 루프때도 쿠죠 키리야는 호죠 에무와 연인이 되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 전이었다. 연애 초기의 어색한 거리감을 세번째 느끼는 중이었고, 거짓말을 좀 할까 고민하던 감찰의는 도합 십년 쯤 되는 호죠 에무의 연인 타이틀을 숨기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네번째, 이쯤 되면 루프에 대해 모르고 싶어도 깨닫게 된다. 쿠죠 키리야는 호죠 에무의 고백을 일주일정도의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이번에는 돌아가지 않겠다, 하고 결심을 되새기며 반복한 시간들을 세어보고는 그럼 내가 에무랑 몇 살이나 차이가 나는 거라고 생각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다섯번째다. 쿠죠 키리야는 더 이상 위험하고 불확실한 모험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는 호죠 에무의 연인이 되지 않기로 했다. 근 이십년쯤 되는 기억을 끌어안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거짓말은 특기였으므로 에무를 향한 마음을 숨기는 것도 쉬웠다. 호죠 에무를 사랑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쿠죠 키리야는 아예 CR을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시야 언저리에 그가 들어올 때면 항상 웃게 되어버리니까. 이름을 불릴 때 사랑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 그만할 수 없으니까. 어깨를 끌어안으며 놀래켜주는 일에 조금의 사심도 담겨있지 않다고 그런 거짓말은 할 수 없으니까… 쿠죠 키리야는 에무의 얇은 어깨를 툭툭 쳐 주고는 손을 흔든다. 오후에도 힘내~ 하고. 에무는 아직 씁쓸한 표정을 다 숨기지 못한 채로 웃는다. 네, 키리야씨도요. 키리야는 에무가 떠날 때 까지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채로 자리를 지켰다. 쿠죠 키리야는 호죠 에무를 사랑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한 20년쯤 같은 사람을 사랑하면(물론 계속 같은 시간대를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질릴 줄 알았는데, 잘하면 금슬 좋은 노부부 소리도 들어봤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선글라스에 손을 걸었다. 그래,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 에무가 헤어지자고 하지 않았다면. 헤어지지 않았다면. 호죠 에무가 쿠죠 키리야를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래 아마도 그렇게 계속 사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 하고, 여전히 호죠 에무를 사랑하는 쿠죠 키리야는 덤덤하게 중얼거린다. 시간이 되감겨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지점은 에무가 좋아한다는 간단한 말로 고백을 하던 그 날이었다. 시간이 되감기는 시점은, 그 날짜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방식은 똑같다. 죄송해요. 힘들어요. 지쳤어요. 그만하고싶어요. 에무는 헤어지자는 말을 꼭 그렇게 돌려서 했다. 키리야는 항상 그 말에 대답하는 걸 힘들어했다. 어떻게 해도 서투른 진심이 나와버리니까. 필사적으로, 그래 미안해 에무가 그렇다면 본인은 에무의 뜻대로 할게 그러니까 에무가 더는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어설프게 꼭 하고싶은 말을 숨긴채로 이야기했다. 거짓말은 못했지만 진심도 말하지 않은 채로 네번이나 에무를 보냈다. 그리고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그렇게 고백의 순간인 것이다. 에무가 수줍고 긴장되고 떨리는 목소리로 좋아해요, 하고 말하는 그 순간. 키리야는 세번째인가 네번째부터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래. 에무가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CR에는 아무도 없다. 응석을 부리는 걸까 생각하며 손을 올린 키리야가 에무의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호죠 에무는 사랑스럽다. 부정할 수 없다. 곁에 있는 순간순간마다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전엔 그렇게나 쉬웠는데. 아무도 없을 때 몰래 이름을 부르고는 좋아해, 하는게 하루의 낙이었는데. 쿠죠 키리야는 그 때를 되새기듯 입술을 달싹여 보았다. '에무. 좋아해.' CR은 여전히 정적에 휩싸여 있었고. 에무는 잠이 들어 있고.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멎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쁘지 않은 욕심이야. 손가락이 에무의 입술에 닿았다. 톡,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잠꼬대인지 진심인지 호죠 에무가 속삭인다. 죄송해요. 그만할게요. 한참동안 손을 내리지 못하던 쿠죠 키리야는 서류를 치우고 에무의 고개에 기댔다. 정적 속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상한 짝사랑 속에서 잠드는 것도 절대로 나쁘지 않아. 절대로.
에무가 어깨를 두드린다. 키리야 씨, 졸리세요?
아냐, 하고 고개를 치켜들면 에무가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죠 키리야는 알 수 있다. 외울 수도 있었다. 에무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고, 어떤 표정이고, 몇 시 몇 분이고, 날씨는, 장소는, 지나는 사람들은, 들리는 소리, 하지만 이건... 호죠 에무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인이 되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속삭이지 않았다. 그러니 애초에 그를 괴롭거나 힘들거나 지치게 하거나 외롭게 하거나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 일도 없었는데 대체 왜 루프가 다시 시작되어 버렸는지 쿠죠 키리야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좋아해요. 라는 에무의 말에, 나도, 하고 조금 다급하게, 아주 간절하게, 에무도 놀랄 만큼 애절한 표정으로 대답하고야 만 것이었다.
쿠죠 키리야는 몇 번의 루프를 더 반복했다. 그는 루프를 막으려 들지 않고 그냥 흘려보냈다. 고백을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하는 순간 또 다시 루프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에무가 지쳐서 이별을 통보하기까지는 약 5년 정도가 걸리고, 키리야는 그 5년을 영원히 반복하며 사는 것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에무의 지쳤다는 말에 미안하다는 말로 답하고 눈을 감는다. 열 번째 이별이었다.
둘은 높은 확률로 2년 안에 살림을 합쳤다. 집을 이리 저리 옮겨 보았지만 역시 세이토와 가장 가까운 곳이 편했다. 자가용을 사기도 했다. 면허 시험은 아주 쉬웠다. 에무는 샴푸 린스의 잔량을 확인하지 않는 버릇같은게 있었다. 키리야는 항상 그것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충해두는 버릇이 있었고. 에무가 좋아해 매번 챙겨보는 드라마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긴급 속보로 마지막화 중간 즈음에 방송이 잘려버리긴 하지만. 에무는 훌쩍거리며 울다가 눈물도 닦지 못한 채 속보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피해는 없는 경미한 지진이다. 그 다음 해 여름에는 태풍때문에 돌맹이 하나가 날아와 부얶 창문이 깨진다. 가끔은 그게 오늘이었는지 내일이었는지 햇갈려 테이프를 붙이는 걸 잊었다가 창문이 와장창 깨져버리기도 했다. 5년째의 겨울 초입, 에무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며 여행을 떠나곤 했다. 쿠죠 키리야는 잡지 않는다. 대신 에무를 조수석에 태워 기차역까지 마중했다. 휴가를 차곡차곡 모아 갑자기 훌쩍 떠나버리는 에무를 몇 번이나 전부터 봐 왔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키리야는 출발한 기차를 쳐다보며 핸들에 머리를 기댔다. 모든게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일 때가 많았다. 봄까지 갈 때도 있었지만, 그래봤자 6년은 넘기지 못한다. 에무는 몰래 울고 왔는지 부은 눈을 하고 말을 건다. 키리야 씨, 잠깐 괜찮으세요?
키리야는 이별이 코앞임을 알고 있었다. 에무는 지치고 힘들다고 했다. 키리야씨 잘못이 아니에요. 하고 말하기도 한다. 키리야씨를 사랑한 제 잘못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텅 비고 공허한 눈에서 사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쿠죠 키리야는 다시금 그가 자신을 명확히 사랑했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서...
...돌아가기 위해서? 일흔 아홉번째의 이별이 이뤄지려던 무렵에 쿠죠 키리야는 눈을 크게 떴다. 돌아가? 지금의 에무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는 항상 내뱉던 미안하다는 말을 갈무리한 채 에무에게 손을 뻗었다. 언제나 이 루프는 알 수 없는 어떠한 힘에 의해 알 수 없는 목적을 가지고 이별과 시작이라는 이정표 두 개만을 가진 채로 반복되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게... 목적이 있었다면? 그는 지칠대로 지친 얼굴의 에무를 마주하고 숨을 삼켰다. 목적이. 그래, 에무에게 계속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거라면. 에무가 이별을 고한 시점에 루프가 이뤄지는게 아니라 에무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포기했을 때, 에무에게 다시 한 번 사랑받기 위해 지금의 에무를 버리고 과거의 에무에게 집착하는 거라면...
쿠죠 키리야는 에무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그리고 다른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본인은 아직, 에무를 사랑해서... 아직도 에무를 사랑해서. 이 지옥같은 이별의 반복이 에무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쿠죠 키리야는 고백을 받아들였던 순간처럼 간절히 말했다. 나를 포기하지 말아줘. 침묵. 1초가 1년처럼 길다. 에무는 갈라진 목소리로 노력해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지만요. 그가 덧붙인다. 힘들어요. 키리야씨. 이런게 사랑이라면 저는 처음부터 사랑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몰라요. 키리야씨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키리야씨도 힘들지 않았을 거예요. 제 사랑은 누군가가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이 아닌가봐요. 하물며 저에게도 무거운데...어떻게 하면 좋은 거예요, 이런 감정을...
키리야는 에무를 끌어안는다. 괜찮아. 하고 말한다. 괜찮아. 사랑이 무거울 수 있어. 에무의 사랑이라면 그게 얼마나 무겁든 괜찮아. 에무니까. 본인이 에무를 사랑하니까. 수십년의 세월 속에서도 그 감정은 닳아 문드러지지 않은 채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으니까. 에무를 사랑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으니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라. 마지막 말을 주워삼키며 그는 에무의 등을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