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고 해도 둘이다...
2018.11.3 파라드
죽지 않는단건 뭘까.
불로불사는 아니다.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살아있다. 모두가 죽은 지금까지도, 그는 살아있었다. 누군가는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죽이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늙지 않고, 쉬이 병들지 않는다. 전뇌세계를 헤엄쳐 다닐 수도 있고, 프로그램의 뒷면으로 숨어들 수도 있었다. 게임 속에 뛰어들 수도 있고, 주인공과 만날 수도 있고. 참 편하다. 버그스터라는건.
건전지가 닳아 작동하지 않게 된 게임기가 줄곧 낡아빠진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침대에는 이불을 덮은 무언가가 있다. 모든 가구 위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고, 그건 바닥도 똑같았다. 하지만 발자국은 없었다. 그가 이곳에 존재하는데도 몇년이나 방치된 것 같은 방의 모습. 존재를 부정하는 공간같다는 생각과 함께, 부정당한 버그스터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깨지고 더러워진 유리에 테이프를 붙여 얼기설기 기워 둔 창이었다. 무너져내리길 감당하지 않고서야 열 수 없는 창. 그는 초록으로 뒤덮인 도시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지겹도록 싱그러운 풍경이 뇌리에 박힌다. 지워지지 않을 듯이, 그렇게.
버그스터 바이러스와 싸우던 의사들은 세계가 이렇게 끝장나리라고 생각이나 해 봤을까? 버그스터 바이러스가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바이러스 하나가, 세계를 뒤덮어서, 그들이 자랑하던 수술조차 소용 없이, 그 어떤 백신도 만들어지지 못한 채로, 사람들을 절망에 잠식시켜가며 퍼져나가...모두가 죽을 거라고.
살아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아니,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없었다. 그러니 없는 거다. 그들이 없다면 다른 누가 살아있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가 죽은 판에 다른 인간이 살아있다고 해봤자 전혀 기쁘지 않지만....
2019.4.17 도글라니오 전투 이후 반년쯤 후?
아사카 케이치로가 저 스스로 병가를 냈다. 전화로 보고받은 힐톱 관리관이 자리에 앉은 두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자 사쿠야는 호들갑을 떨었고, 츠카사마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열이 펄펄 끓어 제발 병원 좀 가라고 등을 떠밀어 보내봤자 진료 후 처방약을 들고 복귀하는 고지식한 인간이니 놀랄 수 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오늘은 오지 않을 거라고 하니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 되었다. 힐톱은 하하 웃으며 분재로 눈을 돌렸다. 병원에 들러서 상태를 확인하고 오늘 출근할지 말지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 하는 것을 그냥 하루 푹 쉬고 내일 출근하라 반쯤 강요한 건 둘 다 모를 터다. 요란한 걱정을 시작하는 사쿠야와 순찰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츠카사 두 사람 모두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아리송한 감정을 얼굴에 띄우고 있었다.
끊긴 전화를 가만 내려다보던 케이치로가 툭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아닙니다, 출근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전하는 대신 얼른 병원에 들렀다 본부로 가는게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마친 채였다. 힐톱은 오늘 출근하면 내일 강제로 휴가를 쓰게 만들겠다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직 갱글러의 잔당이 남아있는 이상 패트렌쟈 3인 중 한 사람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위험한 건 힘 없는 시민들이었다. 케이치로는 그걸 가만 누워서 지켜볼 위인이 되지 못했다.
-뭐야~ 그냥 오늘 하루 쉬면 되잖아?
병원에 들리는 일련의 과정이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았다. 좋은 예감이다. 평일 아침인데다 자신이 향하는 과에는 급한 병증을 느끼고 내원할 환자가 많지도 않을 테니. 어림잡아 점심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제 자리에 도착할 수 있을 터다. 케이치로는 길가로 나서 택시를 잡았다. 길을 잘 모를 때는 뛰어가는 것 보다 이 편이 낫다. 목적지를 말하고 카시트에 몸을 누이자 택시기사가 어물쩡한 목소리로 말을 붙여 왔다.
"국제경찰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인기인이네. 사복이여도 이렇게 금방 알아보고.
병원에 갱글러라도 있느냐는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건만 기사가 꺼낸 화제는 뜻밖이었다.
"루팡렌쟈는 검거되었나요?"
"아."
-오?
케이치로가 일반인에게 공개해도 좋을 정보를 고르느라 말을 끌자, 기사는 죄라도 지은 듯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야 큰 뜻은 없습니다만, 제 딸이 루팡렌쟈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요. 통 행방이 묘연하다고 걱정을 크게 하길래 혹시나 싶어서."
-이거 완전 정의의 히어로 취급인데~?
"그렇습니까."
케이치로는 내놓으려던 답을 모두 주워삼키고 백미러를 쳐다보며 문장을 끊어냈다.
"괴도에 관한 정보는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기밀은 아니지, 그냥 케이쨩이 말하기 싫은 거잖아.
"아닙니다, 제가 더 죄송하죠. 사적인 호기심으로 귀찮게 해드렸군요."
-루팡렌쟈는 도글라니오의 금고 안에 갇혀 있습니다. 금고를 열 방법은 찾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이제 와서는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야노 카이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살짝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케이치로는 택시요금을 지불하고 서두르지 않은 발걸음으로 걸었다. 야마모토 클리닉이라는 간단한 이름의 정신건강의학과는 단과병원으로 이 건물 2층에 위치했다. 자주 다닐 가능성을 염려해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골랐으나 괜찮은 곳인지 지금의 케이치로가 판단할 방법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서 올라오고 있었으나 멀쩡한 다리를 두고 계단을 피할 이유는 없다. 방화문으로 분리된 계단에서는 발소리가 잘 울린다. 한 사람 분이다.
"대상이 명확한 환각과 환청이란 말씀이시죠."
"네."
의사는 케이치로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특이한 케이스네요." 환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로 둔 노트에 뭔가를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히 긴장한 케이치로가 의자에서 등을 떼고 바로 앉으며 되물었다. "어떤 부분이?"
"아사카 씨에게 찾아온 그, 구하지 못했다는 시민 분이, 환각과 환청이라는 점을 곧바로 깨달았다는 부분이죠. 증세가 나타난게 오늘 아침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오늘 아침에 제가 구하지 못한 시민의 환각을 봐서 병원에 왔습니다. 이게 절대 흔한 일이 아니거든요. 보통은, 아사카 씨 같은 상황에 놓인 분들은 자신이 본 게 환각이라는 생각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내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이의 영혼이나 귀신 같은게 나를 찾아와 나를 심판하려 드는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게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기보다 쉽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네요."
"어떻게 그게 본인 머릿 속에서 나온 가짜란걸 깨닫게 되셨죠?"
"진짜 그 사람이라면 저를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요."
"확신하시는군요."
"네."
"하지만 본인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고."
"...네."
"알겠습니다. 천천히 이야기 해 보도록 해요."
얼마나 천천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케이치로는 참을성있게 심호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리겠구나. 오늘은 출근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들어찼다. 그 안에 자리잡은 누군가를 밀어내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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